보현사 (묘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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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현사 (묘향산)는 묘향산에 위치한 사찰로, 묘향산은 아미산, 향산, 태백산 등으로 불리며 단군신화의 무대로도 알려져 있다. 1042년 창건되었으며, 고려 시대에 여러 차례 중창을 거쳤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거점이었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연고가 있는 절이다. 주요 전각으로는 대웅전, 만세루, 관음전, 영산전, 수충사, 장경각 등이 있으며, 다보탑, 석가탑, 수충사 등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 전쟁 중 미군의 폭격으로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으나 이후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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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 (묘향산)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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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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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보현사 |
한자 표기 | 普賢寺 |
로마자 표기 | Bohyeonsa |
위치 |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
산호 | 묘향산 |
본존 | 보현연명보살 |
창건 연도 | 968년 (고려 광종 19년) |
창건자 | 탐밀대사 |
중흥 연도 | 982년 (성종 원년) |
중흥자 | 굉곽대사 |
문화재 정보 | |
국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유형 | 국보 |
지정 번호 | 40 |
주소 | 평양직할시 모란봉구역 향암리 묘향산 |
시대 | 고려 |
역사 | |
창건 | 968년 (고려 광종 19년) |
종파 | 화엄종 → 교종 (일제강점기) |
사격 | 조선삼십본산 (일제강점기) |
2. 역사
묘향산은 아미산 혹은 향산으로도 불렸는데, 모두 불교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단군신화의 무대로도 알려져 있다.
《묘향산보현사기》(妙香山普賢寺記)에 따르면, 고려 인종 19년(1141년)에 탐밀과 굉확 두 승려가 처음 보현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1028년 탐밀은 영변군에 암자를 짓고 머물렀으며, 1038년부터 굉확이 함께 수행하였다. 1042년 243간 규모의 사찰을 짓고 승려 300명이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보현사의 시초였다. 1044년에는 8각 9층 석탑을 세웠다. 문종 21년(1067년)에는 황실로부터 토지를 하사받았으며, 인종 19년(1141년) 김부식, 문공유 등이 《묘향산보현사기》를 지어 보현사의 역사를 기록했다.
고종 3년(1216년) 거란 잔당들이 압록강을 넘어 쳐들어와 보현사를 불태웠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묘향산에는 360여 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1] 임진왜란 당시 봉선사에 봉안되어 있던 세조의 어진을 강화도로 옮겼다가 보현사가 있는 영변군으로 옮겼으며,[2] 전주사고의 실록과 태조의 어진을 보현사에 임시로 안치하기도 했다. 선조 36년(1603년) 강화도로 옮겨진 실록을 토대로 재인쇄를 거쳤고, 그 가운데 한 부는 인조 6년(1628년)까지 묘향산 불영대의 묘향산사고(妙香山史庫)에 보관되었다.
보현사는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운 곳이기도 하다. 1600년 석가세존금골사리탑을 세웠고, 1604년 서산대사는 묘향산 금강굴에서 입적하였다.[4]
1911년에는 조선 30본산(이후 조선 31본산)으로 지정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의 폭격으로 보현사의 주요 건물을 포함한 절반이 파괴되었으나,[1] 이후 조선불교도련맹에 의해 재건되었다.
2. 1. 고려 시대
968년(고려 광종 19년) 탐밀대사가 안심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건립하였다.[1] 982년(성종 원년) 탐밀대사의 제자 굉확대사가 중창하고 보현사로 이름을 바꾸었다.[1] 1028년(현종 19년) 탐밀이 영변 지역에 암자를 짓고 머물렀고, 1038년(정종 4년) 굉확이 탐밀과 함께 수행하였다.[1] 1042년(정종 8년) 243간 규모의 사찰을 건립하고 승려 300명이 머물렀으며, 1044년(정종 10년) 8각 9층 석탑을 건립하였다.[1]1067년(문종 21년) 황실로부터 토지를 하사받았다.[1] 1098년(숙종 원년) 달보대사가 중창하였다.[1] 1141년(인종 19년) 김부식, 문공유 등이 《묘향산보현사기》를 작성하였다.[1] 1216년(고종 3년) 거란 잔당의 침입으로 사찰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강동의 역)[1] 1361년(공민왕 10년) 지원대사가 세 번째 중창을 하였다.[1]
2. 2. 조선 시대
조선 태종의 1407년(태종 7년) 폐불 정책으로 보현사는 폐사되었다. 1424년(세종 6년) 불교 탄압 때에도 보현사는 존속이 허가된 사찰에 포함되지 않아 계속 폐사 상태였다.1449년(조선 세종 31년) 해정대사가 보현사를 네 번째로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봉선사(奉先寺)에 있던 세조의 어진을 보현사로 옮겼고,[2] 실록과 태조의 어진도 보현사에 임시로 안치했다. 1603년(선조 36년) 강화도로 옮겨진 실록을 토대로 재인쇄했고, 그 중 한 부는 1628년(인조 6년)까지 묘향산사고(妙香山史庫)에 보관되었다.
보현사는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운 곳이기도 하다. 1600년(선조 33년) 석가세존금골사리탑을 세웠고, 1604년 휴정은 묘향산 금강굴에서 입적하였다.
1634년(인조 12년) 화재가 발생했고, 1644년(인조 22년) 허백대사가 다섯 번째로 중창했다. 1761년(영조 37년) 다시 화재가 발생했고, 이듬해 남파대사와 향악대사가 여섯 번째로 중창했다.
2. 3. 일제강점기
1911년 사찰령 시행 규칙(7월 8일자)에 의해 조선 30본산(1924년 이후 조선 31본산)으로 지정되었다.2. 4. 해방 이후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후,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국제 연합군으로 참전한 미국군의 폭격으로 보현사의 주요 건물을 포함한 절반이 파괴되었다.[1] 하지만, 이후 북한의 불교 조직인 조선불교도련맹에 의해 재건되었다.3. 주요 전각
보현사는 넓은 경내를 자랑하며, 주요 건물 대부분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축을 따라 위치해 있다. 하지만 절의 중심부는 다른 전각과 사당으로 둘러싸인 넓은 잔디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현사의 가람 배치는 남북축선상에 산문과 만세루, 대웅전 등 보현사의 주 건물들을 배치하고, 이 축선과 직교하여 동쪽에 관음전, 영산전, 수충사 등의 건물을 횡으로 배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보현사는 조계문, 해탈문, 천왕문의 세 문을 통해 들어가는 방식이었지만, 현재는 절 측면에 있는 문을 통해 들어간다. 바깥 문인 '''조계문'''(曹溪門hanja)은 1644년에 건립되었으며 두 개의 천왕 상을 모시고 있지만, 현재는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 조계문과 절의 중간 문인 '''해탈문'''(解脫門hanja, "열반의 문") 사이에는 절의 역사를 상세히 기록한 기념비가 늘어선 길고 나무가 늘어선 길이 있다. 이들 중 일부는 한국 전쟁의 파편 자국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보현사의 안쪽 문은 '''천왕문'''(天王門hanja, "사천왕의 문")으로, 같은 이름의 불교 신상들이 있다.[5]
천왕문을 지나면 바로 앞에 과거의 참선당이었던 '''만세루'''(萬歲樓hanja, "만세의 누각")가 있다. 만세루 앞에는 1044년에 건립되어 국보 제7호로 지정된 9층 다보탑(多寶塔hanja)이 서 있다.[5]
대웅전과 만세루 사이의 뜰에는 14세기에 건립되어 국보 제144호로 지정된 13층 석가탑(釋迦塔hanja)이 서 있다.[5]
대웅전 오른쪽에는 작은 정원을 지나 '''관음전'''(觀音殿hanja)이 있고, 관음전 동쪽에는 '''영산전'''(靈山殿hanja)이 있다.[5]
절의 북동쪽 모퉁이에는 담으로 둘러싸인 '''수충사'''(酬忠祠hanja, "충성을 보상하는 사당")가 있다. 수충사 남쪽, 잔디밭 동쪽에는 '''장경각''' (藏經樓hanja)으로도 알려진 절의 기록 보관소가 있다.[5]
3. 1. 현존하는 전각
- '''대웅전''' (大雄殿hanja): 보현사의 본전이다. 1765년에 건립되었으나 1951년 한국 전쟁 때 미국의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1976년에 원래 모습대로 다시 복원되었다.[5]
- '''만세루''' (萬歲樓hanja): 과거의 참선당으로, 1951년 미국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1979년에 재건되었다. 재건 시 원래의 나무 대신 콘크리트를 사용하였다.[5]
- '''관음전''' (觀音殿hanja):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딴 전각으로, 1449년에 건립되어 보현사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국보 제57호로 지정되었다.[5]
- '''영산전''' (靈山殿hanja)[5]
- '''수충사''' (酬忠祠hanja): 1794년에 건립된 사당으로, 1592-1598년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었던 승려들을 기리고 있다. 내부에 서산대사를 위한 추모 행사가 열렸던 곳이다. 국보 제143호로 지정되었다.[5]
- '''장경각''' (藏經樓hanja): 절의 기록 보관소로, 고려대장경 사본을 보관하고 있다. 1951년 미국의 폭격으로 원래 건물이 소실되어 현대식으로 다시 지어졌다.[5]
3. 2. 소실된 전각
20세기 초에 존재하였으나 현재는 사라진 건물들은 진상전, 명월당, 대장전, 극락전, 명부전, 응향각, 조사전 등이다.[5]4. 문화재
- '''다보탑''' () : 1044년에 건립되었으며 대한민국의 국보 제7호로 지정되었다.[1]
- '''석가탑''' () : 14세기에 건립되었으며 대한민국의 국보 제144호로 지정되었다.[1]
- '''관음전''' () :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딴 전각으로 1449년에 건립되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대한민국의 국보 제57호로 지정되었다.[1]
- '''수충사''' () : 1794년에 건립된 건물로, 1592년~1598년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었던 승려들을 기리는 곳이다. 서산대사를 위한 추모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국보 제143호로 지정되었다.[1]
- '''장경각''' () : 고려대장경 사본을 보관하고 있다. 고려대장경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지만, 원래 목판은 해인사에 있다.[1]
5. 묘향산과 보현사
묘향산은 아미산, 향산, 태백산 등으로 불렸으며, 단군신화의 무대로도 알려져 있다. 보현보살의 신령한 도량이 있는 산을 의미하는 아미산이나, 《증일아함경》의 묘사대로 향기를 내는 산을 의미하는 향산이라는 이름은 모두 불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묘향산에는 360여 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진다.[1] 묘향산은 한국 불교의 중요한 성지 중 하나였다.
고려 인종 19년(1141년)에 황명에 의해 세워진 《묘향산보현사기》(妙香山普賢寺記)라는 비문에 따르면, 탐밀(探密)과 굉확(宏廓) 두 승려가 처음 보현사를 창건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묘향산 보현사는 묘향산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다.
참조
[1]
서적
신증동국여지승람
[2]
서적
대동지지
[3]
기록
선조실록
1599-07-08
[4]
문화재
보현사석가여래사리비
[5]
뉴스
가까워진 남북관계… 같은듯 다른 남북불교
http://www.ibulgyo.c[...]
불교신문
2018-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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